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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속에 무엇이 진실인가? 호흡의 비밀 그리고 우주_自强 不息의 길은 멀고도 힘든길...그러나 가야할길...]
* 천부습유(天符拾遺) 4절
或通一路唯空空 不屍寢中逢其境
혹통일로유공공 불시침중봉기경
"간혹 통하는 외길 있으니 공공할 따름이다.
시체처럼 잠자지 않는 가운데 그 경지를 만나리라"
한 길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길이 있는가?
사람은 나기 이전에 이미 ‘자기’가 있었고, 그러기에 그 ‘자기’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다.
그것을 벗어나고자 함이 공부요, 배움이다.
이것은 학문(學文)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의 학문은 오히려 그 길을 막아버리고, 그 인연대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게 한다.
절대의 문제를 풀지 않는 배움은 배움이 아니다.
그러면 배운다 했을 때 배움의 길은 있는가?
우주 자체에 진리는 있는가?
우리는 과연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가?...?
답은 한 가지...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다.
‘나’라는 존재가 이미 여러 수십, 수천생을 거듭하여 생긴 생이기 때문에
이미 그 의문에 부딪혀 볼 수 있는 숱한 기회가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까닭은 직접 부딪치지 않고 질러 가려다가
끊임없이 돌고 도는 쳇바퀴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가고 못 가고의 문제는 결국 인연법의 문제이다.
인연에 의해 그 길이 열린다.
궁극적으로 대도(大道)의 유무(有無)는 문자 너머에 있다.
이 이야기는 습유 4절을 이야기하기 위한 전제이다.
한 길이 있고, 그것은 공공(空空)할 따름이라 하는데...,
애초의 날숨이 있게 했던 근본 자리이기에 ‘空空’이라 하고,
그 ‘空空’은 하나이며,
그곳으로 가는 길은 그래서 ‘한 길’일 뿐이다.
그 길은 뚫어가는 길이 아니라, 이미 뚫려져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진리가 한 길에 갖추어져 있는데,
그 속 한 길에서 갖추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러 갈 따름이다.
그 길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첫 날숨이 있기 이전의 첫 들숨이 있던 그 곳, 그 곳 속에 길이 있다.
그 곳은 구체적으로 어디이고, 나는 그것을 가지고 演天地(연천지)해 나갈 수 있는가?
天地의 영역이 더 이상 밖이 없는 영역이라면,
空空한 영역은 더 이상 안이 없는 영역이다.
그것은 내 안에 있다.
현재의 좌표 지점인 ‘나’, 이 ‘내’가 핵심 축이고,
‘空空’은 나를 뚫고 천지와 공히 동시에 존재하는 같은 물질이면서 다른 물질이다.
따라서
그 ‘한길’이란 바로 ‘나’이며,
이 ‘나’가 空空으로 가면 ‘진아(眞我)’가 되고,
연천지로 가면 ‘대아(大我)’가 되며,
공공으로 가지 못하면 ‘소아(小我)’가 되고 만다.
정녕 이 ‘한 길’은 ‘내 속’에 있고, 내 속에 그 길이 있는가 ? !
시체처럼 자지 않는 가운데 한 길을 만나리라!
시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살아온 그림자요, 흔적이다.
‘시(屍)’라는 것은 모든 과거를 말하고,
이 과거는 어떠한 권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 과거가 지배하는 것이 ‘시체’이요,
또한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지배하는 것이 ‘환(幻)’이다.
‘현재’라는 것은 끊임없이 나의 찰라들은 과거 속으로 흘러 보내고,
찰라 찰라를 통해 거대한 미래의 파도가 쳐오는 것을 바로 맞 받아치는 그 한 점을 말한다.
내가 내 자신의 지나간 과거와 업연에 의해 살아간다면, 나! 또한 시체이다.
다만, 시체라 아니하는 이유는
현재의 시간을 언제든지 미래로 확인해 나갈 권능이 남아있고,
찰라를 과거화시켜 갈 수 있는 권능이 아직 남아있는 가능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시체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지나온 시간들 가운데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시간은 다 시체처럼 산 것이다.
그래서
잠은 자되,
잠자는 속에서 숱하게 많은 세계를 넘나들되,
그 세계를 고스란히 내 현재 육신을 보듯이 보는 것이 바로 시체처럼 자지 않는 잠이다.
과거에 지배받지 않으며 늘 맨 정신으로 그 길들을 만난다.
자든 깨어 있든...
내 中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그 가운데서 그 길을 만난다.
찰라와 찰라를 연결시키는 힘(志)이 바로 내 삶의 힘이고,
나의 과거로부터 더 이상 지배받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힘이다.
그러므로
이 찰라와 찰라를 이어주는 공부!
이것을 깨치는 눈!
이 속에서 바로 그 길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찰라 면벽이다.
그것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구체적인 방도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때문에 이 습유 네 번째 구절은 몸놀림의 원칙이 된다.
바로 비상시공부와 상시공부의 조화를 말한다.
생활과 수련의 조화이다.
그러면 상시공부를 어떻게 하고 비상시 공부를 어떻게 할까?
이 원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불시침(不屍寢)’이다.
그러면 시체처럼 자지 않는 사람들의 공부법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앞으로의 과제이다.
“살다보니 이런 저런 번뇌도 생기고, 이런 저런 실망도 있고...
그런 실망 속에서, 좌절 속에서 때로는 그것마저 잊어 버리고 순간 순간 연결되지 않은 채,
즐거움도 오고 성냄도 오고 화냄도 오고...
그러는 가운데
그 자체의 쳇바퀴가 싫어
어느 날 문득 앉았더니 언 한 길로 들어가게 되더라!
그 한 길 속에 들어갔는가 싶었는데 그 길을 놓쳐 버렸다.
그 길을 잡으려고 하니 잡히지 않는 길이더라.
그 길을 잡으려 애를 쓰고, 애를 써보니...
지금까지 내가 산 모든 인생이 시체처럼 잠자온 인생임을 알겠더라!
시체처럼 잠자지 않는 그 인생으로 가려고
공부하고 닦고 하는 과정 속에서 다시 그 길을 만났다.
이제는 그 길에서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니,
나는 더 이상 과거에 의해서 지배받지 않는 인간이 될 것이다.“
(4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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